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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心에젖어

눈(雪)에 관한 시 모음

 

 

겨울사랑 / 문정희

눈송이 처럼 너에게 가고싶다

머뭇 거리지 말고

서성대지 말고

숨기지 말고

그냥 네 하얀 생애속에 뛰어들어

따스한 겨울이 되고싶다

천년 백설이 되고싶다 .

 


/ 김안녕

희디흰 타이레놀을 절구에 빻아

세계의 공중으로 훠어이 훠이

울음을 그칠 수 없으므로

겨울, 인간의 길은 미끄럽고 끝간 데 없으므로

신이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극약 처방

 

겨울의 노래 / 복효근

멀리서 보면

꽃이지만

포근한

꽃송이지만

손이 닿으면

차가운 눈물이다

더러는 멀리서 지켜만 볼

꽃도 있어

금단의 향기로 피어나는 그대

삼인칭의

눈꽃

그대

 
 

우리가 눈발이라면 / 안도현

우리가 눈발이라면

허공에서 쭈빗쭈빗 흩날리는

진눈깨비는 되지 말자.

세상이 바람불고 춥고 어둡다 해도

사람이 사는 마을

가장 낮은 곳으로

따뜻한 함박눈이 되어 내리자.

우리가 눈발이라면

잠 못 든 이의 창문가에서는

편지가 되고

그이의 깊고 붉은 상처 위에 돋는

새살이 되자.

 
 

눈 오는 날 시를 읽고 있으면 ​

/ 이생진 ​

시 읽는 건 아주 좋아

짧아서 좋아

그 즉시 맛이 나서 좋아

나도 그런 생각하고 있었어

하고 동정할 수 있어서 좋아

허망해도 좋고

쓸쓸하고 외롭고

춥고 배고파도

그 사람도 배고플 거라는 생각이 나서 좋아

눈 오는 날 시를 읽고 있으면

누가 찾아 올 것 같아서 좋아

시는 가난해서 좋아

시 쓰는 사람은 마음이 따뜻해서 좋아

그 사람과 헤어진 뒤에도

시 속에 그 사람이 남아 있어서 좋아

시는 짧아서 좋아

배고파도 읽고 싶어서 좋아

시 속에서 만나자는 약속

시는 외로운 사람과의 약속 같아서 좋아

시를 읽어도 슬프고 외롭고

시를 읽어도 춥고 배고프고

그런데 시를 읽고 있으면

슬픔도 외로움도 다 숨어 버려서 좋아

눈오는 날 시를 읽고 있으면

눈에 파묻힌 집에서 사는 것 같아서 좋아

시는 세월처럼 짧아서 좋아

 
 

눈사람 / 나태주

​밤을 새워 누군가 기다리셨군요

기다리다가 기다리다가 그만

새하얀 사람이 되고 말았군요

안쓰러운 마음으로 장갑을 벗고

손을 내밀었을 땐

당신에겐 손도 없고

팔도 없었습니다

 

편지 / 윤동주

누나!

이 겨울에도

눈이 가득히 왔습니다.

흰 봉투에

눈을 한 줌 넣고

글씨도 쓰지 말고

우표도 붙이지 말고

말쑥하게 그대로

편지를 부칠까요?

누나 가신 나라엔

눈이 아니 온다기에.

 

[ 동요] 구두 발자국 / 김영일

하얀 눈위에 구두 발자국

바둑이와 같이 간 구두 발자국

누가 누가 새벽길 떠나갔나

외로운 산길에 구두 발자국

바둑이 발자국 소복소복

도련님 따라서 새벽길 갔나

길손 드문 산길에 구두 발자국

겨울해 다가도록 혼자 남았네

[초등교과서 음악]

겨울 나무 / 이원수

나무야 나무야 겨울 나무야

눈 쌓인 응달에 외로이 서서

아무도 찾지 않는 추운 겨울을

바람 따라 휘파람만 불고 있느냐

평생을 살아 봐도 늘 한 자리

넓은 세상 얘기도 바람께 듣고

꽃 피던 봄 여름 생각하면서

나무는 휘파람만 불고 있구나

 

몇 번의 겨울 / 천양희

하늘 추워지고 꽃 다 지니

온갖 목숨이 아까운 계절입니다

어떤 계절이 좋으냐고 그대가 물으시면

다음 계절이라고 답하지는 않겠습니다

겨울로부터 오는 것이 봄이라고

아주 평범한 말로

마음을 움직이겠습니다

실패의 경험이라는 보석이

저에게는 있습니다

내가 간절한 것에

끝은 없을 것입니다

 

첫눈 / 나태주

요즘 며칠 너 보지 못해

목이 말랐다

어제밤에도 깜깜한 밤

보고 싶은 마음에

더욱 깜깜한 마음이었다

몇 날 며칠 보고 싶어

목이 말랐던 마음

깜깜한 마음이

눈이 되어 내렸다

네 하얀 마음이 나를

감싸 안았다

 
 

겨울은 부동자세로 선다 / 신형식

겨울은 부동(不動)자세입니다.

밤새워 여위어가는 가지위로

안기고 또 안겨 봐도

굴복하지 않는 고독함입니다.

그리워도 결코 핑계대지 않는

고집스런 기다림입니다.

사랑할 줄 아는 것들은

모두 떠나가고

가장 낮은 곳으로  

그들의 고백만이

하얗게 모여 앉는 겨울엔,

끝내 주지 못한 사랑도

얼어붙은 겨울기도도

길가의 이정표처럼 

부동자세로 섭니다.

가슴 깊숙이 숨겼던 것들

모두 녹아흐를 때까지

참아야 할 것들은 참아야 한다고 

입 다물고 선 겨울은,

거친 휘파람 물고

뜨겁게 뜨겁게

부동(不凍)자세로 서 있습니다.

결코 얼어붙지 않겠노라고

어느 절간 / 이생진

소나무가 바람을 막았다

부처님이 흐뭇해하신다

눈 내리는 겨울 밤

스님 방은 따뜻한데

부처님 방은 썰렁하다

그래도

부처님은 웃으신다

 
 

첫눈은 언제 오나 / 이준관

첫눈은 언제 오나.

나는 첫눈을 기다리지.

첫눈이 와야

정말 겨울이 시작되지.

첫눈 오는 날을 위해

나는

장갑이며 털모자며 목도리며

모두 준비해 두었지.

첫눈은 

밤에 

사박사박 몰래 온다는데,

캄캄한 밤

개가 컹컹 짖기만 해도

나는 가슴 두근거리지.

눈 / 윤동주

지난밤에

눈이 소오복히 왔네

지붕이랑

길이랑 밭이랑

추워한다고

덮어주는 이불인가봐

그러기에

추운 겨울에만 내리지 

 
 

겨울 초대장  /   신달자

당신을 초대한다

오늘은 눈이 내릴지도 모른다

이런 겨울 아침에 나는 물을 끓인다

당신을 위해서

어둠은 이미 보이지 않는다

내 힘이 비록 약하여 거듭 절망했지만

언젠가 어둠은 거두어지게 된다

밝고 빛나는 음악이 있는 곳에

당신을 초대한다

가장 안락(安樂)한 의자와 따뜻한 차와

그리고 음악과 내가 있다

바로 당신은 다시 나이기를 바라며

어둠을 이기고 나온 나를 맨살로 품으리라

지금은 아침

눈이 내릴 것 같은 이 겨울 아침에

나는 초인종 소리를 듣는다

눈이 내린다

눈송이는 큰 벚꽃 잎처럼 춤추며 내린다

내 뜰안에 가득히

당신과 나 사이에 가득히

온누리에 가득히

나는 모든 것을 용서한다

그리고 새롭게 창을 연다

함박눈이 내리는 식탁 위에

뜨거운 차를 분배하고

당신이 누른 초인종 소리에 나는 답한다

어서 오세요

이 겨울의 잔치상에

 

싸락눈 / 김소운

하느님께서 

진지를 잡수시다가

손이 시린지

자꾸만 밥알을 흘리십니다.

 

 

눈 / 김종해

눈은 가볍다

서로가 서로를 업고 있기 때문에

내리는 눈은 포근하다

서로의 잔등에 볼을 부비는

눈 내리는 날은 즐겁다

눈이 내리는 동안

나도 누군가를 업고 싶다 

 

작은 지붕 위에 / 전봉건

작은 지붕 위에 내리는 것은 눈이고

작은 창틀 속에 내리는 것은 눈이고

작은 장독대에 내리는 것도 눈이고

눈 눈 눈 하얀 눈

눈은 작은 나뭇가지에도 내리고

눈은 작은 오솔길에도 내리고

눈은 작은 징검다리에도 내리고

새해 새날의 눈은

하늘 가득히 내리고

세상 가득히 내리고

나는 뭔가 할 말이 있을 것만 같고

어디론가 가야 할 곳이 있을 것만 같고

한 사람 만날 사람이 있을 것만 같고

장갑을 벗고 꼭 꼭 마주 잡아야 하는

그 손이 있을 것만 같고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 황지우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영하 13도

영하 20도 지상에

온몸을 뿌리 박고 대가리 쳐들고

방비의 나목(裸木)으로 서서

두 손 올리고 벌받는 자세로 서서

아 벌받은 몸으로, 벌받는 목숨으로 기립하여, 그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온 혼(魂)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속으로 불타면서

버티면서 거부하면서 영하에서

영상으로 영상 5도 영상 13도 지상으로

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

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 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 피는 나무이다

 

눈 / 이은봉

눈이 내린다

두런두런 한숨 속으로

저희들끼리

저렇게 뺨 부비며

눈이 내린다

별별 근심스런 얼굴로

밤새 잠 못 이룬 사람들

사람들 걱정 속으로

눈이 내린다

참새떼 울바자에 내려와 앉는 아침

아침 공복 속으로

저희들끼리 저렇게 뽀드득뽀드득

어금니를 깨물며 

 
 

눈 위에 쓴 시 / 류 시화

​누구는 종이 위에 시를 쓰고

누구는 사람 가슴에 시를 쓰고

누구는 자취 없는 허공에 대고

시를 쓴다지만

나는 십이월의 눈 위에 시를 쓴다

흔적도 없이 사라질 나의 시

 
 

겨울산 / 황지우

너도 견디고 있구나

어차피 우리도 이 세상에 세 들어 살고 있으므로

고통은 말하자면 월세 같은 것인데

사실은 이 세상에 기회주의자들이 더 많이 괴로워하지

사색이 많으니까

빨리 집으로 가야겠다.

 
 

첫눈 오는 날 / 곽재구​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하늘의 별을

몇 섬이고 따올 수 있지

노래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새들이 꾸는 겨울꿈 같은 건

신비하지도 않아

첫눈 오는 날

당산 전철역 오르는 계단 위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들

가슴속에 촛불 하나씩 켜들고

허공 속으로 지친 발걸음 옮기는 사람들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다닥다닥 뒤엉킨 이웃들의 슬픔 새로

순금빛 강물 하나 흐른다네

노래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이 세상 모든 고통의 알몸들이

사과꽃 향기를 날린다네

 


첫눈 / 송수권

눈이 내린다 어제도 내리고 오늘도 내린다

미욱한 세상 깨달을 것이 너무 많아

그 깨달음 하나로 눈물 젖은 손수건을 펼쳐들어

슬픈 영혼을 닦아내 보라고

온 세상 하얗게 눈이 내린다 어제도 내리고 오늘도 내린다

살아 있는 모든 것 영혼이 있고

내 생명 무거운 육신을 벗어 공중을 나는 새가 되라고

살아 있는 티벳인이 되라고

한밤중에도 하얗게 내린다

히말라야 삼나무숲을 흔들며

말울음 소릴 내며

이렇게 고요하게 지금 첫눈이 내린다 

 
 


전봇대 / 정일근

은현리 겨울 들판을

전봇대가 걸어가신다

하루도 쉬지않고

뛰엄뛰엄 발자국 남기며

들판을 건너 마을을 지나

마을을 지나 험한 산길을 따라

키다리 아저씨가 찾아가시는 곳

솥발산 7부 능선에 웅크리고 있는

하늘 아래 저 먼 첫 집

양철지붕을 인 오막살이에

밤마다 삼십촉 알전구가

따뜻하게 켜진다

 

첫눈 오는 날 만나자 / 안도현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어머니가 싸리 빗자루로 쓸어 놓은 눈길을 걸어

누구의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순백의 골목을 지나

새들의 발자국 같은 흰 발자국을 남기며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러 가자

팔짱을 끼고 더러 눈길에 미끄러지기도 하면서

가난한 아저씨가 연탄 화덕 앞에 쭈그리고 앉아

목 장갑 낀 손으로 구워 놓은 군밤을

더러 사먹기도 하면서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

눈물이 나도록 웃으며 눈길을 걸어가자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첫눈을 기다린다

첫눈을 기다리는 사람들만이

첫눈 같은 세상이 오기를 기다린다

아직도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약속하는 사람들 때문에 첫눈은 내린다

세상에 눈이 내린다는 것과

눈 내리는 거리를 걸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얼마나 큰 축복인가?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

커피를 마시고 눈 내리는 기차역 부근을 서성거리자

첫눈 오는 날 만나자 / 정호승

사람들은 왜 첫눈이 오면

만나자고 약속을 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왜 첫눈이 오면

그렇게들 기뻐하는 것일까.

왜 첫눈이 오는 날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하는 것일까.

아마 그건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첫눈이 오기를 기다리기 때문일 것이다.

첫눈과 같은 세상이 두 사람 사이에 늘 도래하기를

희망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한때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있다.

첫눈이 오는 날 돌다방에서 만나자고.

첫눈이 오면 하루종일이라도 기다려서

꼭 만나야 한다고 약속한 적이 있다.

그리고 하루종일 기다렸다가 첫눈이 내린 밤거리를

밤늦게까지 팔짱을 끼고 걸어본 적이 있다.

너무 많이 걸어 배가 고프면

눈 내린 거리에 카바이드 불을 밝히고 있는

군밤장수한테 다가가 군밤을 사 먹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약속을 할 사람이 없다.

그런 약속이 없어지면서 나는 늙기 시작했다.

약속은 없지만 지금도 첫눈이 오면

누구를 만나고 싶어 서성거린다.

다시 첫눈이 오는 날 만날 약속을 할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첫눈이 오는 날 만나고 싶은 사람,

단 한 사람만 있었으면 좋겠다.

겨울 일기 - 함박눈 / 목필균

아침에 눈을 뜨니

세상은 온통 은빛 속에 있습니다

깃털로 내려앉은 하얀 세상

먼 하늘 전설을 물고

하염없이 눈이 내립니다

오늘 같은 날에는

같은 기억을 간직한 사람과

따끈한 차 한 잔을 나눌 수 있다면

예쁜 추억 다 꺼내질 것 같습니다

하얀 눈 속에 돋아난 기억 위로

다시 수북히 눈 쌓이면

다시 길을 내며 나눌 이야기들

오늘 같은 날에는

가슴으로 녹아드는 눈 맞으며

보고싶은 사람을 그리워합니다

 

무슨 말인가 더 드릴 말이 있어요 / 김용택

오늘 아침부터 눈이 내려

당신이 더 보고 싶은 날입니다

내리는 눈을 보고 있으면

당신이 그리워지고

보고 싶은 마음은 자꾸 눈처럼 불어납니다

바람 한 점 없는 눈송이들은

빈 나뭇가지에 가만히 얹히고

돌멩이 위에 살며시 가 앉고

땅에도 가만가만 가서 내립니다

나도 그렇게 당신에게 가 닿고 싶어요

아침부터 눈이 와

내리는 눈송이들을 따라가보며

당신이 더 그리운 날

그리움처럼 가만가만 쌓이는

눈송이들을 보며

뭔가, 무슨 말인가 더 정다운 말을

드리고 싶은데

자꾸 불어나는 눈 때문에

그 말이 자꾸 막힙니다

 

우리의 겨울 / 서윤덕

팔장을 끼듯

그대 주머니에 손을 넣고

따뜻함을 충전받습니다.

가까이 더 가까이

한 주머니속에 두 손

겨울이라서 더 좋습니다.

 
 

사랑/ 조태일

첫눈이 내린다.

어디고 없이 제멋대로

내리고 내리는 것 같지만

내릴 곳을 보아 가며

서둘지 않고 내린다.

첫눈이 내린다.

지상의 왼갖 성명聲明들을 잠재우며

지상의 왼갖 낙서들을 지우며

한량없이

하이얗게 내린다.

높고높은 하늘을 지나서

가파른 절벽을 지나서

풀잎들의 머리 위를 지나서

움직이는 것들 위에 내린다

숨쉬는 것들 위에서 내린다

꿈꾸는 것들 위에서 내린다.

오오, 오오, 소리치지는 않고

오오, 오오, 그 입모양만 보이며

우리들 귓바퀴 근처에 내린다.

보아라, 보아라, 소리치지는 않고

보아라, 보아라, 그 입모양만 보이며

우리들 눈앞에

뺨 비비며

첫눈은 그렇게 그렇게

붐빈다.

 

눈 위에 남긴 발자국 / 용혜원

 

밤새 하얀 눈이 내려

온 세상이 하얗다

 

눈 덮인 새벽길에

첫 발자국을 남기려니

마음이 상쾌하고 즐겁다

 

온통 하얀 세상을 보니

내 마음에까지 눈이 내린 듯 하다

눈을 밟으며 걷노라니

노래가 절로 나온다

 

행복은 늘 주변에  있다

하얀 눈이 내리는 날이면

하늘에서 복을 내려 주는 것만 같다

 

오늘은 하얀 눈 위에

첫 발자국을 만들며

행복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련다

 
 

눈 / 박용래

하늘과 언덕과 나무를 지우랴

눈이 뿌린다

푸른 젊음과 고요한 흥분이 서린

하루하루 낡아 가는 것 위에

눈이 뿌린다

스쳐 가는 한 점 바람도 없이

송이눈 찬란히 퍼붓는 날은

정말 하늘과 언덕과 나무의

한계는 없다

다만 가난한 마음도 없이 이루어지는

하얀 단층

 

사랑 이야기 / 정연복

겨울 찬바람을 알몸으로 버티어 온

나목(裸木)의 가지들과

하늘하늘 내리는 눈송이가 만나

서로 뜨겁게 보듬어 안는다

처음에는 사르르 녹더니

쌓이고 또 쌓여

이윽고 가지마다 눈꽃이 피네

그래서 가지들은 따뜻하다

허공을 맴돌던 눈송이는

오붓이 제 집을 찾는다

삭풍 한번 몰아치거나

한줌의 햇살이 와 닿으면

덧없이 스러질 사랑인데도

오!

저 여리고 가난한 목숨들의

단단한 포옹

찰나의 눈부신 동거(同居)

 
 

눈의 풍경 / 서정윤

마을에서 가장 높은 까치집에 눈이 쌓인다

바람은 때때로 이토록 아름다운 모습

우리 앞에 펼쳐 놓고는

설레는 나를 유혹한다

사람의 마음속에도 눈이 오게 할 수 있을까

온갖 거짓과 위선, 사랑과 행복까지도

다 덮어놓고는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마음과 욕심은 조금만 나오게 하고

남을 위하는 마음과 작은 것에 만족하는 기쁨을

많이 나오게 하여

삶이 따사롭게 할 수 있을 것을

나뭇가지의 눈이 녹아

물방울로 떨어지는 놀이터

어느 정도의 고통은 나를 긴장시켜

겨울 찬바람에 맞설 용기를 준다 

 
 
 

눈이 내리네      /김해인

 

그닥 높지도 않은 하늘가에서
너플너플 하얀눈이 내리네
멀어진 고향에서 보내오는 편지인 듯
얼굴에도 손등에도 날아와 앉네
빨리 열어보지 않으니
스르르 물이되어 떨어지네

아! 저기
세워둔 자전거는
내다버린 연탄재는
편지를 모아 놓고있네
그 편지 속에는 그리운 얼굴도 있고
하얀 속에는 고향 사투리에 속삭임도 있네
그 속에는 흥건한 눈물도 있고
눈물에는 아릿한 티끌이 뜨네

편지는 읽을새 없이 자꾸만 쌓이는데
어둠이 내려 읽을수가 없네
날 저물어 편지는 바스락 얼어들고
내리는 편지지는 점점 작아져
버들강아지 솜털만해 지는데
편지 한장에는 ㄱ자 하나
또 다른 편지에는 ' 하나

소복이 쌓여가는 눈 을 헤집어
잃어버린 무었을 찾을것 처럼
생각없이 비추는 가로등 불빛에
손끝에 끌려 나오는 너 는
아!
너 는!
고향설(故鄕雪) 이었구나

나 에 손끝에도 눈물이 흐른다

 

 

하얀 눈        /박인걸

 

하얀 눈이 하늘에서 내릴 때

더러는 즐거운 미명을 지르며 반기거나

연인과의 추억을 떠올리거나

깊은 행복감에 젓기도 하며

그 하얀 결정체로 꽃잎처럼 내려앉는

아름다움에만 취할 뿐

바다를 떠난 무수한 콜로이드가

아득한 허공을 바람에 떠밀려

두려움에 떤 아픔을 기억하는 이는 없다.

소복하게 쌓인 눈길을 걸으며

사람들은 연애 소설의 주인공이 되거나

연인과 팔짱을 끼고 눈 위를 걸으며

끝없는 밀어를 속삭이다가

벌러덩 드러누워 몸 도장을 찍고

그 고운 순간을 셀카에 가득 담지만

출처와 경로를 기억 못한 채

포근한 분위기에 젖어

함부로 짓밟을 때 마음이 아프다.

단순하게 살지 말고 생각하며 살자

나는 남에게 행복을 주었는가.

아름다움은 절정에서 일어나는 순간이다.

고움과 화려함에 들뜨지만 말고

너도 누군가에게 설렘을 주어보라.

뭇 가슴을 달아오르게 해보라.

 

 

싸락눈         /이건청

 

사리탑에 싸락눈 내리다

 

탑신을 어루만지니

손끝에 전해오는 싸늘한 돌의 감촉

몇 과의 사리를 품은 낡은 돌 위로

큰산의 말씀들이

사각사각 흩날리고 있다.

 

 

눈          /이시영  
 
눈이 내린다
오늘에서 내일로 이어지는 굳은 언약 위에
그 작은 실핏줄 위에
뛰는 숨결처럼 뽀오얀 눈이 내린다
이제 막 피 흘리며 쓰러진 희망과
가슴 속에 남은 말과
거리에 깊이 패인
노여운 함성을 지우며

 

 

눈 오는 풍경      /최영희
 
하늘에서 눈이 오네
다독다독 이불 끌어 덮어주던 어머니 손길처럼
하늘에서 눈이 와
온- 세상
하얀 눈 이불 덮어주네

하늘에서 어머니 사랑처럼
눈이 내리네
욕구불만 아이를 달래듯
토닥토닥 등을 두드리며
폭신폭신한 눈 이불 덮어주네

왁자지껄하던 거리도 집도 자동차도
금세 잠든 듯 고요하고
마술에 걸린 듯 요동도 못 하네
어머니 손길 같은 고요함
세상이 온통 쌔근쌔근 잠이 든
착한 아가의 얼굴처럼 평온하네

아- 나도 저 포근포근한
사랑의 마술에 걸리고 싶어라
눈맞으러 가야겠네.

 

 

다시 눈이 내리면      /백창우

 

눈이 내리면

다시 첫눈이 내리면, 나는 길을 떠날거야

이 세상 아무것도 몸에 지니지 않은 채

나비의 잠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그리운 나라 찾아갈거야

여기는 내가 머물 곳이 아니야

여기는 나같이 꿈뜬 사람이 살만한 데가 아니야

사는 게 익숙해질 때 쯤이면 어느 사이

생의 끝에 서 있을 걸

망가지기 전에

몸도 마음도 다 망가져 아주 엉망진창이 되기 전에

떠날 채비를 해야 해

눈이 내리면

다시 첫눈이 내리면, 나는 길을 떠날거야

먼길 나서기에는 눈 오는 날처럼 좋은 날이 없지

눈이 그치기 전에 이 세상을 벗어나야지

아무도 모르게

 

 

눈 온 아침        /이영광

 

천지가 눈을 쓴 채 가만히 있다

지붕들도 나무들도

각(角)이 안으로 무너졌다

만만하여,

만만치 않다

마을 속의 마을

마음 속의 마을

겉으로 부풀어 둥글다

안팎이 있다면 다들

꼴이 같으리

당신, 누구와 한편

되어본 적 있어?

당신 편 하얗게 지우고

누구 편에 가 서본 적 있어?

물어쌓는 눈발

 

눈을 쓸면 새 길이 난다

세상의 모든 딜을 낳는 골목

후미진 모퉁이에서

저 미지의 길끝까지 걸어가

가가호호(家家戶戶)

따뜻하게 쓸어오고 싶다

눈 온 아침

 

 

지하철에 눈이 내린다     /윤제림  

 

강을 건너느라
지하철이 지상으로 올라섰을 때
말없이 앉아 있던 아줌마 하나가
동행의 옆구리를 찌르며 말한다
눈 온다
옆자리의 노인이 반쯤 감은 눈으로 앉아 있던 손자를 흔들며
손가락 마디 하나가 없는 손으로
차창 밖을 가리킨다
눈 온다
시무룩한 표정으로 서 있던 젊은 남녀가
얼굴을 마주 본다
눈 온다
만화책을 읽고 앉았던 빨간 머리 계집애가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든다
눈 온다
 

한강에 눈이 내린다
지하철에 눈이 내린다
지하철이 가끔씩 지상으로 올라서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눈이 온다, 무언의 증인처럼     /손현숙​

 

벌판에 나무 역광으로 서있다 허공 속으로 뿌리 내렸다 팔 벌린 가지에는 이파리 한낱도 없다

눈썹 쓸 듯, 쓸어가는 구름 묵음으로 내리는 하늘 그림자

 

한 발짝 건너 또 한 발짝 근처가 없는 사람의 집, 그 어디쯤에서 발자국 풀어 살아도 되겠다

 

사람이 살기도 하고 살지 못하기도 하는, 아무나 함부로 들어서지 못하는 땅 나도 저 땅에 발

들여놓은 적 있다 구릉에는 푹푹 눈이 쌓이고 비밀의 보유자들이 무언의 증인처럼 왔다가는

돌아서야 하리라

 

지도에도 없는 나라 가는 길은 달라도 번개와 우레가 들끓어서 고요하게 피어나는 꽃, 구름이

땅에서 돋아 하늘로 간다 발바닥은 쉴 곳을 모른다는데

 

 

눈·2          /박정순  
 
달빛 별빛 없어도 너는
화안한 백색의 등불로 서서
바람 깃 다독이며
온 세상을 덮은
부처님의 마음을 닮았다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기인 햇살의 그림자
목에 걸어놓고
그리움의 실을 뽑아내는
누에고치

일년 365일 베틀에 앉아
씨줄 날줄로 엮어
눈부신 육모 꽃송이로 피어났다

모든 인연 끊어버린
너의 차디 찬 의지는
온갖 허물
따스하게 덮어주는 더 큰 사랑이었다

겨울 꽃이 피는 날이면
떼를 쓰지 않으려고 하는데도
요구하지 않으려면서도
좀 멋진 시가 되어 달라고
자꾸만 나의 시를 귀찮게 군다

 

 

오는 눈을 바라보며    /초암 나상국

새벽 4시쯤이었을게다
밤새도록
나무며

가로등 불빛이
추운 겨울비에
오돌돌 떨면서 흠뻑 비를 맞더니
젖은 몸 감싸주려는 듯
솜털 같은 함박눈이
어둠을 하얗게 지우며
여기저기 내린다
비 내리고 나서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유난히도
비를 좋아하고
눈을 좋아했던
그녀를 떠올려 본다
저 함박눈처럼
해맑던 그녀의 웃음소리가
돌연
눈꽃으로 방긋방긋 피어나
나를 향해
쭉 쭉 날아든다

 

 

바다 위에 내리는 눈    /이정우
 
 눈이 내립니다.
 바다에 기선이 떠 있고
 아무데로도 떠나지 않는 정박(碇泊).
 눈이 내리면
 그대로 서서 눈을 맞아야 합니까.
 
 눈이 내리면서
 마음으로 갈 길을 막는 것도 아닌데,
 어디로도 떠나지 못함은
 바다 위에 저희들의 발걸음이
 아직은 서투른 까닭입니다.

 

 

하얀 눈      /여노 김경철

 

이른 아침

구름 한 점 없고

맑디맑은 하늘이

조금씩 흐려지더니

 

머리는

서서히 아파져 오고

답답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달래 겸

집을 나서 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오후가 조금 지나니

내내 흐렸던 하늘에선

소리 소문도 없이

하얀 눈이 내린다

 

너무나 작아서

하얀 눈을

잡을 수는 없지만

조금씩 내리는

하얀 눈을 보니

 

아침부터

우울했던 기분이

풀리는 것처럼

다소 느껴진다

 

어두웠던 기억은

머리에서 모두 지우고

하얀 눈처럼

순백의 기억 만을

머릿속에 간직하자

 

 

눈        /권태인

 

밤은

시간을 꿰차고

아침으로 흐르고

 

눈은

하늘을 꿰뚫고

세상을 바꾸었는데

 

온통

새하얀 세상은

내 마음을 흔드네.

 

 

서설瑞雪이었으면   /정심 김덕성

 

살 속으로 기습하던

엄동설한 칼바람도 잠 들었는가

달도 별도 사라진 심야

 

대지위에 모양새가

하늘도 차마 볼 수 없었는가

눈을 펑펑 쏟아 부어 마침내

말끔히 씻어낸 듯싶은

꾸며 놓은 은세계

 

구석구석을 살펴봐도

한 점 띠를 볼 수 없이 꾸몄는데

우리 모두의 간절한 염원인

그 못된 전염병까지 묻었으면

 

점점 안개처럼 사라져가는

우리네 차가운 가슴마다 뜨거운

사랑을, 희망을, 행복을 주는

서설이 되었으면 싶다

 

 

눈이 내려    /임두고

 

더이상 붙잡을 것 없어

안타까운 손 끝 위로

허허로운 이마 위로

눈이 내려

그대 숨결로 쏟아지고

더러는 풀썩풀썩 그대 외투자락으로 무너져

불면의 밤 백지처럼 엎드려도

내 밟고 온 길 부적처럼 빛나지 못해

어지럽게 찍힌 내 발자국

다만 그대 아픔으로 결재되어 남을 뿐

나는 할 말이 없다

매서운 겨울 새 소리

가시나무 숲 먼먼 산기슭을 두드리며

천갈래 만갈래 눈발로 치내려와

가장 빛나는 목소리로 타올라도

내 귀엔 천형처럼 빗장이 걸리고

가파른 골목 어디쯤

발목 시리도록 잠겨 있을 그대 목소리

내 언어 아직 부적처럼 빛나지 못해

그대와 나 다만 헛것으로 만나 서성일 뿐

눈이 내려

그대 숨결로 쏟아지고

더러는 풀썩풀썩 그대 외투자락으로 무너져

불면의 밤 백지처럼 엎드려도

나는 여전히 닻을 내린 실어증 환자

잠든 내 얼굴이라도

부적처럼 빛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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