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꽃에 관한 시모음 -One

흰 백합꽃 /이연주
푸줏간 주인의 손아귀에 넘어가
살 다루는 숙련가에게
주검이 처분되고 있다: 흰 백합꽃
뼈는 토막쳐져 내장은 발발이 끄집혀 끌려나와
담즙을 분비하던 흔적 역력한
입맛 당기는 간,
꽃술은 모태로 돌아간다
긁어낸 태내 아이처럼 속수무책의
무자비한 주검: 순결이 절단난 백합 한 송이
입술이 덜덜 떨리는 밤이 아니냐?
어김없이 왕왕 짖어대는 흰 개들의 유령,
백합밭이다
피 묻은 쇠 꼬챙이 손가락들은 에잇, 에잇!
살아남은 자들이 수천 번씩 다짐하는
생존법칙은
순결을 지키는 모든 눈의 정수리를 찍어
시간을 훔쳐내라
푸줏간 귀퉁이에 음산하게 버티고 선
도끼자루에 끼어진 굶주린 식욕의 낮과 밤
흰 백합꽃 - 낙태 전문의의 오른손에서
심란하게 가위질당한다
늙은 독재자의 동첩으로
덤핑 약초로 팔려나가게
세상 잘 모르는 꽃, 두 번씩이나 죽어서도
주검엔 프리미엄이 없어
여리디여린 꽃 이파리.
어느 날 백합꽃을 만나다 /架痕 김철현
계절의 정점에서 한 송이의 꽃을 만났다.
아담한 백합 한 송이와의 만남은 시작부터
나를 흠뻑 취하여 혼미하게 했다.
언제나 나를 반기는 싱그러움은 나로 하여금
꽃은 절대로 시들지 않는다는 생각을 그 어느
진리처럼 숭배케 하며 몇 해를 행복케 했다.
어느 날 꽃은 내 눈앞에서 힘없이 시들더니
구겨진 종이쪽처럼 형편없이 허물어지고
내 마음속의 꽃도 일그러진 흉물이 되었다.
그때부터 나에게 백합꽃이란 향기도 없으며
아름답지도 않을 뿐더러 만날만한 가치도
만나고 싶지도 않은 존재다. 더 이상…….
백합꽃 향연 /靑山 손병흥
은은한 청순미 만끽해보는
신록 우거진 싱그러운 계절
활짝 핀 자태 향기 내뿜으며
순결 희생 신성 꽃말 간직한
나리꽃 하얀나리 하늘나리
날개하늘나리 참나리 솔나리
단연 으뜸 아름다움 우아함
커다란 기쁨 가득 주는 꽃
이브가 흘린 참회의 눈물
제우스가 헤라에게 바치던 꽃
성모마리아 표상 성모의 꽃
입 맞추고픈 백합 꽃잎 속
탐스런 그 눈매 입술처럼
돋보이는 당신의 새하얀 미소
떠올려보는 추억 숨 가쁜 사연
아름답고도 몹시 슬픈 이야기
어여쁜 아리스의 전설어린
눈길 유혹하는 예쁜 그 모습.
백합꽃이기에, /신군선
철림
들꽃이라면 쉽게 꺾었을 텐데
목련이라면
달빛 가득 채웠을 텐데
연꽃이라면
돌중이라도 되었을 텐데
백합꽃이라서
호랑나비 되어
그 향기에 취해
때 묻지 않은
그리움 가득 채우렵니다.
그물 같은 마음 엮어
백합꽃
뿌리까지 뽑아 메고
훨훨 날아다닐
뜨거운 가슴이 되렵니다.
세월에 묻지 말고
그 꽃 한 송이
내 가슴에
살짝 꽂아주지 않으렵니까?
백합꽃이라니요 /홍문표
백합꽃이라니요
희디 흰 빛깔들이
일백 개로 합쳤단 말인 가요
곱고 고운 마음들이
일백 개로 합쳤단 말인 가요
얼마나 희고 또 희기에
백합화라 했을 까요
얼마나 곱고 또 곱기에
솔로몬의 옷보다 더 곱다 했을 까요
수고도 아니 하고 길쌈도 아니 했는데
누가 저리 희고 고운 꽃을 만들었을 까요
외로운 산골짝이
가시밭 엉겅퀴에서
더더욱 희고
더더욱 고운 얼굴
가슴 가슴으로 스며드는 그윽한 향기
누구를 위해 저리도 눈부신 모습일까요
나사렛의 마리아
화사한 오월의 신부처럼
그렇게 순결하고 곱고 아름다운 이여
나도 백합꽃이 되고 싶어요
아니면 줄기 끝에 매달린
작은 잎새라도 되어
갈릴리 호수 저 멀리에서
당신만을 바라보고 싶어요
백합꽃의 기개 /未松 오보영
찌는 듯한 무더위
따가운
뙤약볕 아래서도
고고한 자태
기품 있는 모습으로
당당하게
하얀 꽃망울
활짝
터트릴 수 있음은
어떤 외압에도 굴하지 않는
굳건한
네 성정 덕이라
진한 향기 내뿜어주려는
투철한
네 사명감이라
백합의 말 /이해인
지금은
긴 말을
하고 싶지 않아요
당신을 만나
되살아난
목숨의 향기
캄캄한 가슴 속엔
당신이 떨어뜨린
별 하나가 숨어 살아요
당신의 부재(不在)조차
절망이 될 수 없는
나의 믿음을
승리의 향기로
피워 올리면
흰 옷 입은
천사의 나팔소리
나는 오늘도
부활하는 꽃이에요
붉은 백합꽃 /태안 임석순
붉은 백합이 활짝 핀 순간
향기 없이 매혹적인 자태로
핏빛의 뜨거운 정열에 홍색 실 같은
붉은 입술의 백합꽃을 봅니다
길게 뻗어 오묘하게 나온 수술과 암술,
뒤로 젖힌 멋들어진 여섯 개 꽃잎 모습이
비단 천처럼 고급스럽게 화려합니다
입술처럼 붉은 꽃잎은
뜨거운 태양만큼이나 정열과 젊음이
생기롭고 화려하여 사랑스러운데
야속하게 시간은 짧게 흘러갑니다
화려했던 그 모습,
시간은 기다려 주지 않으니
그 아름다운 순간은 금방 사라져 갑니다
어제의 화려함이 전혀 기억나지 않을 만큼
너무나 초라하게 떨어져 가고 흩어져서
그러다 희망의 싹이 트기도 전에
결국은 흙으로 돌아갑니다
*붉은 백합(百合) 꽃말: 열정, 기쁨, 열렬한 사랑.
한 송이 백합 같더니 /鞍山백원기
적막한 산중 가시밭길에
한 송이 흰 백합 같던 너의 모습
나무 밑 그늘진 곳에 홀로 있었지
순결한 마음 변함없던 사랑
꽃잎은 바람에 흩날렸지만
향기는 아직도 남아 있다
아름다움 묻어있는 네 자태
아직도 찢어진 약속이
겨울 속에 잠들어 있단다
때때로 생각 키우는 너의 슬픈 감성
조금도 지워질 줄 모른다
네 앞에 서면 진실했던 순간
추워도 봄은 이미 눈 밑에 와 있지만
소식 없는 네 발걸음이 쓸쓸하다
다시 듣고 싶은 어여쁜 네 목소리
먼 옛날 높은음으로 불러주던 노래
무척이나 듣고 싶단다
가시밭에 한 송이 흰 백합화
고요히 머리 숙여 홀로 피었네
어여뻐라 순결한 흰 백합화야
그윽한 네 향기 영원하리라
청도 시편 2―백합공원 /이성복
길 따라 귀두(龜頭)처럼 솟은 망두석 사이로
초로의 유방처럼 꺼져가는 키위 빛 무덤들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이박사 메들리는 여기서도 끝날 줄을 모른다
길 옆 붉은 칸나는 지나가는 덤프트럭과
레미콘 행렬에 일일이 인사하느라 바쁘고
망혼처럼 떠도는 복숭아 꽃잎, 꽃잎 사이로
우리 업소는 시집 안 간 암퇘지만 고수합니다,
펄럭이는 플래카드 따라 들어가면, 갑자기
너는 고수할 것이 없다 앙앙 깨물고 싶은
식욕은 어느 식육 식당 육고기에도 없는 것이다
책상위의 백합 /황도제
직업이 없어 방에 뒹구는 남편
옆에 다가가기가 싫어 고개 돌리며 사는 아내
꼴 보기 싫지만 측은했던지
책상 위에 백합 화분을 올려놓았다.
자기 얼굴 대신이라는 듯
서로 데면데면한 이틀이 지나자
스스럼없이
옷고름을 풀고
꽃을 보인다.
나 괜찮아? 몸매는 어떻구. 아직 쓸만 해?
이 여자가 갑자기 안 하던 말을--
중얼거리자
갈라지자. 죽자
그만 해요
갈라지는 것도
죽는 것도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잖아요.
진지한 백향(百香)
남남 같던 이 여자 정신이 돌았나
아니면 무얼 잘못 먹었나.
이해하기 어려운 눈짓과 말
다가오는데
눈가에 주름이 가득하지만
고운 자태
내 얼굴을 쓰다듬으며
아직도 우리들 가슴엔
별빛이 꺼지지 않았어요.
등불로 삼는 자식을 위해
살아야 하잖아요.
파는 백합과란 말씀 /이 원
피망의 관점에서 보자면
노란 파프리카
빨간 파프리카
주홍 파프리카
모두 적극 가담으로 분류되지만
그러는 너 피망!
고추의 입장에서 보자면
단고추로 변질된 시기도 미상인 요주의 종자로 분류되지만
감자 가지 토마토 후추 고추 모두 거느린
가지과의 시선에서 보자면
정원에 심으면 관상용
밭에 심으면 한 순간에 식용으로 몰 수 있는
고추 너!
결실인 열매의 입장에서 보자면
파가 가득한 파밭에서
왜 방향만 자꾸 따지고 있는 거냐
입장부터 안 되잖아
파의 방향 속에 파를 넣지 말고
파를 보란 말이다
파란 그런 것
파……는 백합과란 말씀
가진 거라곤 파밖에 없어서
파라면 무조건 편파인
파 밑 흙이 주장하길
당신
당신은
좌파도 우파도 아닌 편파
편파는 절뚝발이
조금 짧은 다리와 조금 더 긴 다리는 함께 가지고 있는 것
편파가 가장 애틋하고 무례한 분류법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편파로 싹을 틔어온 나!
흙이 가진 고유 권한
그러니 당신
당신
또 거기 당신
좌파도 우파도 아닌 편파로
전 생애 동안
당황하고
눈물 나고
절룩일 때
최고의 축복
고추 열매는 당신(唐辛)이라고도 부르는데
당신도 당신이 열매가 아니라고는 생각하지 않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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